본문 바로가기
독서일지

Read ‘n’ Watch - 은중과 상연

by 해방클럽장 2025. 10. 13.

 

 

1. 남성이 사라진 세계

드라마 제목에서 이미 암시되듯, 〈은중과 상연〉에는 남성의 자리가 없다.

아버지 없이 자란 주인공뿐 아니라, 작품 전반에 걸쳐 남성성은 의도적으로 제거되어 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여성 중심의 서사를 넘어, 남성의 부재를 전제한 페미니즘 실험극으로 읽힌다.

그러나 그 실험은 결코 가볍지 않다.

작가는 단순한 여성 서사에 머무르지 않고, 트랜스젠더나 조력사(助力死) 같은 사회적 이슈를 교훈적으로 배치한다.

그 태도 속에는 ‘이야기’보다 ‘가르침’이 앞서는, 교사형 작가의 시선이 엿보인다.

이야기를 감상하는 대신 교훈을 배우게 되는 순간, 시청자는 어느새 작가의 교단 앞에 앉아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2. 시선은 은중이 아닌 상연에게 있다

표면적으로 이야기의 화자는 은중이다.

하지만 실상, 서사의 시선은 상연의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내면을 상연에게 투사하며,

그를 통해 여성의 자립보다는 ‘남성 없는 세계’의 가능성을 탐색한다.

2002년 월드컵의 열기 속에서도 홀로 냉소적이던 상연은, 어쩌면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다.

모두가 환호할 때 의심하는 그 시선 — 그것이 곧 작가의 시선이자, 이 작품의 본질이다.


3. 사랑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한다

은중은 상학을 깊게 사랑한다.

그들의 관계는 짧고 강렬한 원나잇이 아니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고, 신뢰를 쌓아온 연인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 그 관계는 단 하루의 흔들림으로 무너진다.

은중은 그 파괴가 단순한 흔들림 때문이 아니라,

그 관계에 의존하는 나약한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라 말한다.

독립적이고 주체적이어야 하는 여성에게

의존적인 사랑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닌 사치품이다.

이성은 감성을 지배하고, 감성은 점차 냉각되어 간다.

그 괴리 속에서 따뜻해야 할 은중은 사이코패스로,

나르시스트였던 상연은 오히려 로맨티스트로 자리를 바꾼다.

가지지 못한 자는 그것을 부수고 싶고,

가진 자는 그것을 하찮게 파괴한다.

동경하되 부정해야 하는 감정 —

그것이 작가가 만들어낸 역설의 세계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결국 그것을 파괴해야 하는 이유가 된다.


4. 거세된 남성성과 치우친 균형

〈은중과 상연〉의 남성들은 모두 주변부로 밀려난다.

그들은 지켜보기만 하고, 때로는 짧은 조언을 남기는 조연으로 소모된다.

부재하고, 무능하며, 공감하지 못하고, 결코 주도적이지 않다.

이것은 단순히 작가의 선택이라기보다,

이미 사회가 남성성의 후퇴를 강요해온 현실의 반영이다.

드라마 후반부는 의도적으로 남성들을 아예 지워 버린다.

그들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라져 있다.

하지만 한쪽 날개만으로는 하늘을 날 수 없다.

지나친 억압은 반대쪽의 부각을 낳았고,

그 결과 균형은 서서히 붕괴됐다.

이제는 “여성이 살아남기 위해 남성을 지워야 한다”는 논리가

오히려 낡은 신념처럼 들린다.

건강한 남성과 공존하는 사회,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살아볼 만한 사회다.


5. 공허한 아름다움

이 드라마가 보여주는 세계는 아름답다.

감독의 미장센은 섬세하고, 장면 하나하나가 시적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현실과의 단절 속에서 완성된다.

감정의 흐름에는 공감하지만, 그 결말에는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결국 상학은 사랑하지 않는 여성에게 달려갈 용기는 있었지만,

정작 그의 진정한 사랑에게 달려갈 용기는 없었다.

상학은 비겁한 남자였고, 은중은 사랑을 버린 여인이었다.

〈은중과 상연〉은 여성의 승리도, 남성의 패배도 아닌 -

사랑이 사라진 세계의 상실 기록이다.

 

작가가 내놓은 아름다운 조력사라는 결론은 결코 헛헛한 가슴을 채워주지는 못했다.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해도, 세상에는 결코 아름답지 않은 것들이 있다.


✍️ 한 줄 요약

“〈은중과 상연〉은 여성의 자립을 넘어 남성의 부재를 실험한 작품이다.

그러나 그 실험이 남긴 것은 자유가 아니라 공허였다.

한쪽 날개만으로는 날 수 없듯, 이 드라마의 세계는 균형을 잃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독서일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김미경의 마흔 수업  (1) 2023.0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