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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일지

8. 잔소리 - 존경과 존중의 차이

by 해방클럽장 2022. 11. 7.

 

 

 

 
 
젊은 사람들은 '라떼는 말이야' 라는 말을 들으면 자동적으로 귀를 닫는다.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면 세상이 바뀌어 답도 바뀌었다는 이야기다.
 
구시대적 사고를 가지고 있음에도 뭔가 유용한 사람이 되고 싶을 때, 사람들은 라떼를 찾는다.
 
차고 식어 버린 라떼는 이미 상해서 쿰쿰한 냄새가 난다.
 
 
 
 
 
농사 짓는 옛날에야 농부 아빠 말만 잘 들으면 먹고 살만 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의 아빠가 인터넷 세대의 아들에게, 또 그 아들이 메타버스에 사는 손주에게 어떤 조언을 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노인들은 잔소리를 멈추지 않고, 바뀌어 버린 세상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경험이 아직 유의미하다고 외치고 있다.
 
 
 
 
 
이번 손님은 부모님들의 가스라이팅에서 자유롭고 싶어 했다.
 
다 커서 이제 애들을 키우는 한 가장이 되어서도 어른들은 아이들을 해방시켜 주지 않는다.
 
애 키우는 아들에게 아직도 미주알고주알 조언을 멈추지 않고,
 
원하는 대로 될 때까지 이야기를 되풀이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어른들.
 
듣기만 해도 거북한 가스라이팅이지만, 이런 경우는 주변에 허다하다.
 
어른들은 다 똑같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 가는 나 또한 별로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어른들은 왠만해서 멈추지 않는다.
 
뭔가 틈만 보이면 조언하려고 한다.
 
결혼은 왜 안 하냐? 회사는 왜 그만 뒀냐? 영양제는 왜 안 챙겨 먹냐? 추운데 옷은 왜 그렇게 얇냐?
 
아이가 화를 낼 때까지 멈추지 않는 배려를 가장한 참견.
 
결혼할 상대가 있는데 안 하면 돈이 없을테고, 다닐만한 회사를 때려치울 일은 없을테다.
 
몸이 허하면 알아서 보약을 챙겨 먹고, 나이가 들면 내복을 찾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계속 되는 잔소리에 참다 참다 마지막에 화를 내면 어른에 대한 존경심이 없다며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짓밟는다.
 
그런 상황이 되면 아이는 굴복하던지 집을 떠나던지 한다.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어른을 아주 존경하는 아이. 맹목적으로 어른을 따르는 아이.
 
이런 경우는 두 가지의 경우의 수가 생긴다.
 
어른이 정말 존경 받을만한 거대한 존재거나,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의 경우다.
 
아이가 어른이 되면서 깨닫는 것은 어른들이 그다지 어른답지 못하다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그것을 깨달은 아이만이 좀 더 괜찮은 어른이 될 가능성이 있다.
 
자기 앞에 놓인 어른만 존경하는 아이는 그 어른 이상의 사람이 될 수 없다.
 
그 어른을 계속 뛰어 넘어야만 지금 이 부족한 세상이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변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다.
 
 
 
 
 
 
온라인 세상이 되면서 모든 것이 평등해 졌다.
 
평등해졌다는 것은 모든 아빠가 똑같은 아빠라는 뜻은 아니다.
 
결과의 평등이 아니라, 출발선은 같지만 재능과 노력에 따라 결과가 다르다는 뜻이다.
 
예전에 농사 짓던 우리 아빠가 최고였는데, 인터넷을 보면 세상에는 존경 받을만한 위인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금융 위기에 퇴직 당한 아빠보다 이건희가 더 나은 사람처럼 보이고,
 
주식 투자하면 폐가 망신이라는 아빠보다 워렌 버펫이 더 멋져 보이고,
 
사업하다 집 날려 먹은 아빠보다 일론 머스크가 더 존경 받을 수 밖에 없다.
 
엄청 빠른 속도로 변하는 사회에서 아빠는 왠만큼 노력해서는 위인들을 따라잡기 힘들다.
 
다이아몬드 핵수저를 가지고 태어난 아빠, 아이큐 150의 대학교 교수와 같은 출발선에서 다퉈야 존경을 챙취할 수 있다.
 
출발선이 평등해져서 더 힘들어진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옆집 똘이와 경쟁하지 않는다.
 
인스타와 유투브의 수백만 팔로워들을 가진 인풀루엔서들과 같이 달리고 있다.
 
 
 
 
 
 
 
그럼에도 막장 아침 드라마로 시간을 떼우고, 낚시와 골프로 여가를 보내면 아이들에게 점점 해 줄 말이 없어진다.
 
그래서 식어버린 라떼를 찾고, 무시 당하고, 잊혀진다.
 
아이들이 존경하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존경 받을만한 사람이 되지 못한 게 문제다.
 
내가 존경 받을만한 사람이 된다면 알아서 때 마다 찾아 올 것이고, 존경은 내면에서 우러러 나올 것이다.
 
아이들은 존경의 대상을 찾지 못하는 것이지 어른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존경 받을만 하지 못하다고 무시의 대상이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고속도로와 인터넷 광케이블의 수혜자가 바로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존경은 아니지만 사람은 존중 받을 권리가 있다.
 
사람은 인종, 종교, 정치적 성향, 교육 수준, 건강 상태 등 으로 인해 비난 받거나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된다.
 
내가 한국인이라서 존경을 받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존중은 당연한 권리다.
 
내가 나이를 먹어서 존경을 받는 것 또한 우스운 일이지만 나이와 상관 없이 존중 받아야 하는게 사람이라는 존재다.
 
 
 
 
 
 
 
가족 간의 불화는 존중이라는 단어로 치유가 될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 아이는 어른에게 조언하지 않는다.
 
아빠가 매일 술을 먹고 꽐라가 되도, 아침 막장 드라마를 보고 혀를 차고 있어도, 가스통을 메고 광장에 나가도 말리지 않는다.
 
그런데 아빠는 아이들이 게임을 한다고, 넷플릭스 본다고, 시위한다고 잔소리를 한다.
 
존경이라는 단어가 일방적인 것이다.
 
아들은 아빠의 삶에 그다지 관여 안하는데 아빠는 자꾸 아들의 삶에 관여하려고 한다.
 
존중은 상호적이어야 한다.
 
내 공간이 존중 받으려면 상대방의 공간 또한 존중 받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개인주의 서구에서는 이런 생각들이 보편적이다. 물론 모든 집이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애들이 몇 번 이혼하고 결혼하는지 크게 신경 안 쓴다.
 
그게 네 삶이지 내 삶이 되지 않는다.
 
네 성공도 네 성공, 네 실패도 네 실패라고 생각한다.
 
애들이 젖을 떼면서 부터 방을 따로 쓰는 서구에서는 서로의 공간에 대한 존중이 기본적이다.
 
그런데 가족주의 세상에서 넘어온 우리 이민 세대들은 어딘가 어중간하게 끼어 있다.
 
아이들은 개인주의 사회에 사는데 어른들은 아직도 가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큰 방보다 큰 거실을 선호하고, 빨래감을 찾으러 다 큰 아이들 방문을 불쑥불쑥 연다.
 
그래서 싸운다. 어른들은 챙겨주는 건데 애들은 질색하고 짜증을 낸다.
 
 
 
 
 
 

 

 

존경 받을만한 어른은 침묵할 줄 안다.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든 걸 아는 척 하지 않는다.
 
똑똑한 아이들은 미리 미리 어른들에게서 독립한다.
 
세상에 빠르게 적응한 아이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시시콜콜해야 한다.
 
한창 배우고 성장해야 할 아이가 물고기 크기와 골프 스코어에 미리부터 집착한다면 도태될 가능성이 높다.
 
 
 
 
 
세상이 평등해 졌다.
 
예전에는 대학교에 가고 기득권 네트워크에 연결 고리가 있어야만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모든 것이 무료다.
 
몇 세기가 지나서야 위인전에서 만날 수 있었던 그런 존경 받는 어른들이 실시간으로 내게 대화를 걸어온다.
 
맹목적인 존경은 나를 파멸로 이끈다.
 
반대로 잔소리를 경청하고 존중할 줄 안다면 충분히 나를 발전시키고 앞서 나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이 도래했다.
 
강력한 의지만 있다면 나의 발전 가능성은 무궁하다.
 
 
 
 
 
난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할로윈 파티를 싫어한다.
 
악마 분장을 하고 집집마다 저주를 위협하며 돌아다니는 행위 자체가 싫다.
 
그래서 매년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한다.
 
심지어 다른 신나는 이벤트를 만들어서라도 참가하지 못하게 했다.
 
올 해는 특별히 안 좋은 일도 있었고, 충분한 설명도 해 주었지만 아이들의 단호한 결심을 바꾸지 못했다.
 
어떤 쪼다가 희생자 아이들이 할로윈 이벤트에 참석하는 것을 막지 못한 부모들에게 참사의 책임을 돌렸다.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이라면 그런 쓰레기 같은 이야기는 해서는 안 된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아이들이지만 그들이 얼마나 내 말을 안 듣는지, 얼마나 내 뜻대로 안 되는지 모르는가?
 
난 잔소리 대장이지만 이번에는 아이들에게 졌다.
 
아빠의 신앙보다 자신들의 친구들, 그리고 새로운 경험, 그리고 사탕이 더 중요한 나이일테니까.
 
아이들은 풀어줘야 한다. 그래야 성장한다.
 
자꾸 가두면 딱 그 정도 아이 밖에 되지 못한다.
 
아이들을 짓밟아서 나보다 작은 사람을 만들어 싸구려 존경심을 유지하려고 들면 안 된다.
 
내 아이들은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어서 세상을 좀 더 살만한 곳으로 만드는 영웅이 되어야 한다.
 
그럴려면 아이들은 나를 밟고 더 크게 일어서야 한다.
 
 
 
 
 
난 계속 달릴 생각이다. 언젠가 추월 당하겠지만, 내가 걷는 만큼 아이들은 더 빨리 뛰어야 할 것이다.
 
난 그들보다 20여년을 먼저 뛰기 시작했는데 따라잡힌다면 굴욕적이다.
 
내가 한 걸음 더 디딜 때마다 아이들은 두 걸음을 뛰어야 나를 따라 잡을 것이다.
 
그럼에도 뛰지 않는 아이들을 억지로 뛰게 할 수는 없는 법이다.
 
난 이렇게 뛰는데 쫓아 오지 않는 아이들,
 
아이들은 점점 멀어져만 가고 내 가는 길이 맞는지 의문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오늘 난 기도한다. 다른 더 나은 방법은 알지 못한다.
 
 
자녀들을 위한 기도.
 
세상을 창조하신 하느님, 하느님께서는 저희에게 귀한 자녀들을 주시어,
 
창조를 이어가게 하셨으니, 주님의 사랑으로 자녀들을 길러,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게 하소서.
 
 
주님, 사랑하는 저희 자녀들을 은총으로 보호하시어,
 
세상 부패에 물들지 않게 하시며, 온갖 악의 유혹을 물리치고,
 
예수님을 본받아, 주님의 뜻을 이루는 일꾼이 되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아멘.
 
 
 
 
 
난 기도 말고 더 나은 방법을 알지 못한다.
 
기도는 아이들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다.
 
기도는 아이들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어 준다.
 
기도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각자 신념대로 각자의 신에게 매일 빌어야 할 일이다.
 
그런 믿음이 없다면 믿음을 만들어야 할 일이고,
 
그런 신이 없다면 그런 신을 찾아야 할 일이다.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부모는 존경 받아 마땅하다.
 
 
 
 
해방노트.
 
아이들을 잔소리에서 해방시키자.
 
잔소리는 그대가 믿는 신에게.
 

당신의 신은 기뻐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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